2009년 08월 05일
그림자 자국 - 이영도
그림자. 존재가 세상에 드리운 흔적.
드래곤 라자 1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작품, [그림자 자국]. 나는 [드래곤 라자]를 읽지 않았다. 몇년전에 한번 읽어보려는 마음을 가졌었는데, 열권이 넘어가는 분량을 보고 겁먹어서 포기해버렸기에, [그림자 자국]에서 보이는 [드래곤 라자]와의 접점들을 보며 즐길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이 안에는 소설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림자 자국]은 [드래곤 라자] 이후, 먼 훗날의 이야기인 것 같다. [드래곤 라자]의 주인공들은 잊혀지거나 신화속의 인물이 되었고, 긴 시간동안 세상을 지키며 신과 가까운 존재가 되어버린 인물도 있다. 하지만, [그림자 자국]속에서의 [드래곤 라자]의 인물들과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조연과 배경이고, 큰 줄기는 예언자와 그림자 지우개가 이끌어 간다.
모든 것들의 미래를(그리고 과거와 현재도 모두 볼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나.) 마음대로 볼 수 있지만, 그들의 미래를 '강간'하기 싫어서 예언을 하지 않는 예언자. 그리고 존재가 세상에 남긴 흔적까지 모두 지워버리는 그림자 지우개. 이 엄청난 힘을 가진 그림자 지우개에 지워진 존재는 지워졌다는 사실조차 남지않고 말 그대로 '없던 존재'가 된다.
그림자 자국의 내용, 그리고 주제는 크게 예언자와 그림자 지우개가 던지는 두개의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예언자의 존재는 던지는 하나의 질문. '이미 정해진(예언된)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
그림자 지우개도 던지는 하나의 질문. '잊혀져버린 존재가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우선 첫번째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먼저, 맞지 않는 예언은 예언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이 예언이 맞다면, 예언이 틀리는일은 없어야 한다. 작품 내에서 보면, 예언자는 그림자 지우개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것 처럼 이야기했고, 또 왕비는 예언자가 예언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 처럼(왕자를 떨어뜨려 예언자가 받도록 함으로써) 생각했지만, 예언자가 왕자를 떨어지는 받는 미래를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결과를 놓고보면 예언자가 한 예언은 모두 이루어졌다.
작품을 읽어보면, 그림자 지우개보다 더 강한 지우개는 시간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림자 지우개가 단지 시간의 마법적 표현(말이 되나?)이라고 생각한다면, 결국 그림자라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싶다. 그림자 지우개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말을 조금 무리해서 해석하자면 미래는 과거를 통해 바꿀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런 해석은 너무 비약인것 같고, 결론을 내리자면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두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존재가 그림자를 남기듯이, 그림자도 자국을 남기기 때문에. 예언자(그림자)는 지워졌지만, 그는 프로타이스에 의해 예언과 왕자(그림자 자국)를 남기게 되었고, 그것에 의해 세상은 바뀐다. 하지만 더욱 인상적이고 극적으로 나타난 그림자 자국이 있었는데, 바로 이루릴이 보여준 추억속의 존재들의 환영이다. 이제는 그들을 기억하는 존재가 이루릴 하나밖에 없을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잊혀져버린(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 그들이 남긴 추억(그림자 자국)을 이루릴이 세상에 펼쳐보이던 장면. 손바닥 위에서 녹아내리는 눈송이처럼, 붙잡을 수 없기에 잊혀져간 그들이 그녀의 추억속에서 살아숨쉬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그림자 자국은 볼 가치가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드래곤 라자를 못본게 아쉽다!)
그림자 자국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장면은, 프로타이스가 현실을 고정시키며 걸어오는 그 장면. 그에게서 드래곤을 빼니 반항이 남아서 반항해 버리는 그 장면을 보면서 잠시 어이가 없었다. 이 장면 외에도, 형이상학적인 설명을 통해 말도 안되는 것을 그럴싸하게 써놓은 부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이상학적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는 형이상학적인 은유를 통해 표현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형이상학적인 표현은 말도 안되는 것을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에 불과하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공주님과 핸드레이크, 솔로쳐가 나오는 단편들에서도 그랬었는데, 신비롭고 이해할 수 없는 환상(fantays)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도 묘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독자의 상상에 맡겨둔채 넘어가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피를 마시는 새]나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는 딱히 그런 거부감을 느낀적이 없는 것 같은데 [드래곤 라자]의 세계관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잠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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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영도가 써내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적절한 은유와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이 주는 신비와 환상의 매력. 앞으로도 그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
+2009 08 19. 글을 편집하면서 보니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그렇다'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예언에 대한 해석이 바뀜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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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8/05 23:53 | Readout noises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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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림자 자국이라는 것 자체가 약간.. 말이 안되는거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림자를 지워버린다면서요, 그러면 아예 그 사람을 잊어버리고 없는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는데 그 시점 이전의 그림자 자국이 남는다고 하면 그 존재를 지운다고 과거가 바뀌거나 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나요.... 그게 더 깔끔할것같은데! 그나저나 그림자 지우개를 처음 썼을때 정말 혼자 경악했어요. 으악! 이런걸 만들어내다니 뭐 이런..
ㅋㅋ 하여간. 그래도 정신없이 읽었네요! 재밌었어요+ㅁ+ 내일도 모레도 시험보는데 모의고사라 그런지 긴장감이 없어요ㅋㅋㅋ